한줄 詩

가로등이 켜질 때 - 윤의섭

마루안 2015. 11. 1. 20:58



가로등이 켜질 때 - 윤의섭



해가 지고 길 잃은 햇빛 부스러기 힘없이 파닥거릴 즈음

낮과 밤이 몸을 섞다 서서히 뒤바뀌는 그 즈음

가로등은 일제히 외눈을 밝히고 줄지어 선다

이 외눈박이 외계인들은 오래전부터 길가에 죽은 듯이 서 있다가

구부정한 허리로 지상을 내려 보며 문득 눈을 뜨는 것이다

가로등 사이에 소문난 인간사 중에

우산처럼 펼쳐진 빛발을 머리에 이고 입맞춤을 나눈 연인이나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던 꾀죄죄한 꼬마 얘기는

이제 늙은이들 소싯적 만담이다

일몰에 맞춰 지평선까지 늘어선 요즘 가로등에는

축제를 알리는 깃발이 날개처럼 꽃혀 있고

때문에 진화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는 저녁이 되어 눈을 떠 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고

어슴푸레 초저녁 달 너머로 날아가는 가로등 한 그루 보았다더라

가로등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떤 가로등은 불을 켜지 못한 채 시커멓게 서서 죽어 있다

시체를 옆에 세워 놓고 가로등들은 오늘따라 눈이 자꾸 깜빡인다

새벽에 잠들면 다시 깨어나 노을을 볼 수 있을까

어느덧 여명을 비집고 달이 떴지만

산 자들 사이에서 쭉정이같이 죽어 버린 가로등은 날아 오르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꽃 듣고 섰다



*시집, 마계, 민음사








구름의 율법 - 윤의섭



파헤쳐 보면 슬픔이 근원이다

주어진 자유는 오직 부유

지상으로도 대기권 너머로도 이탈하지 못하는 궤도를 질주하다

끝없는 변신으로 지친 몸에 달콤한 휴식의 기억은 없다

석양의 붉은 해안을 거닐 때면 저주의 혈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언제 가라앉지 않는 생을 달라고 구걸한 적 있던가

산마루에 핀 꽃향기와

계곡을 가로지르는 산새의 지저귐으로 때로 물들지만

비릿한 물내음 뒤틀린 천둥소리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한 떼의 무리가 텅 빈 초원을 찾아 떠나간 뒤

홀로 남겨진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혹은 태양에 맞서다 죽어 가고 혹은

잊어버린 지상에서의 한때를 더듬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 간다

현생은 차라리 구천이라 하고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살지 못하는 중천이라 여기고

부박한 영혼의 뿌리엔 오늘도 별빛이 잠든다

이번 여행은 오래전 예언된 것이다

사지(死地)를 찾아간 코끼리처럼

서녘으로 떠난 무리가 어디 깃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소는 길 끝에 놓여 있다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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