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밤엔, 한 번쯤, 그 길을 - 박종해

마루안 2015. 10. 29. 23:57



가을밤엔, 한 번쯤, 그 길을 - 박종해



귀뚜라미 그 조그마한 것들도
밤새워 울어 대는데
내가 어찌 잠들 수 있겠습니까
귀뚜라미 편에 이메일을 띄웁니다


밤새워 귀뚜라미들이 문자판을 두드리는군요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라고
달이 구름의 속살을 비집고 나와
빙긋이 웃는군요
당신도 저 달을 보고 있는지요


가을이 깊어질수록
그리운 병도 점점 깊어지는군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달빛이 내 그림자를 끌고 가는군요


당신도 그 길을 찾아 한 번쯤은 가 보시나요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월이 그 길을 지운다 해도

 

이 가을밤엔, 한 번쯤은,  그 길을....



*박종해 시집, 빈 병, 그루






 

술꾼의 맹세 - 박종해

 


과음으로 며칠 간 혈변을 보고 나서야
작심한다. 술을 끊겠다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 여러 번 맹세했다.
"하느님, 이젠 정말 술을 끊고 당신을 믿겠습니다."
주(酒)에서 주(主)로 가는 길은
왜 이렇게도 어렵고 험난한가.
의사 선생님께서 "무병"이라고 판결을
내리더라도 술을 끊으리라.
그러나, 이 작심도 그때 가서 풀어질는지 모른다.
나의 마음은 간사하니까
"믿어주십시오, 하느님, 어떤 판결이 나더라도
술을 끊겠습니다."
병으로 인해 술을 끊는 것은 술꾼의 수치다.
건강한데도 스스로 술을 끊는 것은
술꾼의 명예다.
나는 이제 명예롭게 은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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