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마루안 2015. 10. 21. 23:39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십년이 넘는 공부 끝에야
암컷의 마음을 얻어 교미할 수 있는 새가 있다


코스타리카의 긴꼬리매너킨은 탱고 스텝의 달인들
그들의 일생은 가무(歌舞)에 바쳐진 셈
소년 매너킨은 생후 오년째부터 스스로 연마하여 몸을 만들고
육년째도 여전히 독학으로 노래와 춤 연습에 전념하다가
칠년째, 마침내 갈고닦은 노래로 스승의 마음을 얻어
문하생 생활을 시작한다면 그건 대체로 운이 좋은 편,
이렇게 해서 사부를 모시고 또다시 십년 공부


드디어 새침한 암컷 앞에 서면
사부가 먼저 절로 예를 갖추고
듀엣 노래와 솔로 나비춤으로 몸을 달군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등넘기 탱고가 시작되는데,
등넘기춤은 여느 탱고처럼 절묘한 타이밍과 박자가 생명이다
암컷이 필생의 수십분짜리 이인조 춤 공연에 매혹되면
사부는 마침내 암컷의 마음을 얻게 되고,
제자는 비로소 조용히 물러나 독립하여
자신의 제자를 구하러 정처 없는 십년 공부 스승의 길을 떠난다


마음 얻기란 그런 것
적어도 십년 공부는 기본이다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창비








길을 가면서 - 엄원태



산길 걷다보면 발아래 지렁이들이 자주 보인다
대개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말라붙거나
짓밟혀 토막 난 몸을 겨우겨우 꿈틀거리고 있다
새들마져 외면하는 이 지난한 필사(必死)의 순례 행렬은
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인지


검은 유리를 두른 자동차들이 거칠게 내달리는
일몰의 산업도로를 건너려는 허리굽은 노파의 막막함과
메마른 흙먼지길 가로질러 새 영역을 찾으려는
지렁이들의 무모함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갈색으로 퇴색해가는 사마귀와
식어가는 돌멩이 위에 미동도 없이 엎드린 잠자리와
마른 호흡으로 고통스레 죽어가는 지렁이의 육신들은
하나같이 같은 길을 애달프게 가고 가는구나


그악스럽던 매미들 울음은 그예 여운조차 없고
여치며 귀뚜라미들 울음마져 점점 희미해져간다
이제 숲마저 헐벗고 가지만 앙상할 겨울이 오면
저의 이슥한 깊이로 한층 더 컴컴해질 골짜기들처럼
생은 제각각의 어둠으로 저물어갈 것이다






# 엄원태 시인은 1955년 대구 출생으로 1990년 <문학과사회>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가 있다. 김달진 문학상, 대구시협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