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막차는 없다 - 송경동

마루안 2015. 10. 13. 09:21



막차는 없다 - 송경동



비 그치고
막차를 기다리고 선 가리봉의 밤
차는 오지 않고
밤바다 쪽배마냥 작은 리어카를 끌고 온
한 노인이 내 앞에 멈춰 선다


그이는 부끄럼도 없이 휴지통을 뒤져
내가 방금 먹고 버린 종이컵이며
빈 캔 따위를 주워 싣는다
가슴 한 가득 안은 빈 캔에서 오물이 흘러
그의 젖은 겉옷을 한 번 더 적신다
내겐 쓰레기인 것들이
저이에게는 따뜻한 고봉밥이 되고
어떤 날은 한 소절의 노래
한 잔의 술이 되어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니
목이 메인다, 눈물이라도 돈이 된다면
내 한 몸 울어줄 것을. 어둔 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섰는가


저기 두 눈 뜨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선
내가 실려 가는데
저기 두 눈 뜨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선
한 세월이 멀어져 가는데



*시집, 꿀잠, 삶이보이는창








순례기 - 송경동



재개발 기다리는 닭장촌 입구께
내가 애용하는 이 이발소는 허름해 좋다
이름도 귀찮다는 듯 한두 획은 버렸다
물은 언제나 오래된 욕조 가득 찰랑이고
찜통 위에선 다친 수건도 노곤노곤


가끔 반장도 하수도계원도 찾지만
대부분은 손 굵은 학생부군신위들
얌전히 앉아 차례 기다린다
때 탄 토정비결 손금과 제 손금 번갈아 보며
멀리서 온 사람들처럼 존다, 잊을 만하면
까치집 지어 온 사람들일수록 주문 많다
박 터진 자리 기계충 먹은 자리 다 가르쳐 주고도
못 미더워 내내 가위 끝만 본다
한 번 깎으면 3개월은 족히 가야겠기에
나중엔 짧게만 깎아 달라 한다


볼이 곰보처럼 얽은 주인아짐은 면도가 전문
부끄러운 잔털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세상의 욕망도 다 깎여나가 맨지름해지면 좋으련만
쉬쉬거리며 머리를 감기는 주인아짐 앞에
고개 수그리고 있다 보면
고개 수그리고 사는 게 억울하고 분통 터지던
지난살이도 다 씻겨 나가 말끔해진다


그런 값 고작 4천 원
츄잉껌 한 개와 말보로 담배 한 대 불 붙여주고
주인 내외 문밖 배웅까지 포함한 값
갈치 굽는 내음 진동하는 어스름 닭장골목
휘파람도 휘휘나 불며 돌아오다 보면
멀리 있는 달보다 가까이 있는 수은등이
내겐 더 소중하고 고맙다는 믿음 하나 오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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