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가을에 - 박두규

마루안 2015. 10. 19. 22:52



이 가을에 - 박두규

 

 

가을을 맞이하는 이파리들
그 마음들은 어떨까
어떤 색으로든
자신의 색깔을 결정지어야 하고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을


가을을 맞아 나는
무슨 색깔로 매달려 있는 지가 궁금하다
연노랑에 선다홍의 고운 물결을 이루었는지
똥색으로 꼬실라진 단풍이 되어
어느 곁가지에서 달랑거리는지


무언가 결정되어야 하는 나이에 이르러
망설임도 의혹도 없으라고 不惑(불혹)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세월이 잡히지 않아 迷惑(미혹)이다
하기야 무엇으로 결정된들
그것에 옳고 그름이야 있을 것인가
다만 자신의 색깔을 결정지어야 한다는
生의 끝자락이 안타까울 뿐
옳고 그름의 경계는 그저
매달려 있는 것들의 조바심이리라


이 가을에, 저마다의 색깔을 얻어
당당하게 지상으로 내려오는
이파리 하나가 부럽다

 


*박두규 시집, 숲에 들다, 애지

 

 





 
숲에 들다 - 박두규

 


그대 눈부신 속살에 들면
편백나무 서늘한 그늘 어디쯤에
정처 없는 것들의 거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생각이 무사하기를 빌며
그대 앞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대 안에 드는 일이 두렵기도 하나
단지, 때가 되어 어미의 자궁 밖을 나왔던 것처럼
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 것뿐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또 날이 저물었을 뿐이다


그대의 어디쯤에
달빛에 빛나는 지붕 하나가 있기를 바란다.
그곳에 들어 내 눈부신 맨몸을 볼 수 있다면
사랑한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것도
잠 못 이루는 짐승들의 매일 밤 울음소리도
그대에 이르기 위한 육탈肉脫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리


강줄기를 타고 오는 한 줄기 바람에도
이승의 한 십년을 뚝, 떼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숲에 쌓인 무수한 잎들의 신음소리가
나의 일상으로 진입해 오고
해가 지는 세상의 두려움 위로
설레는 가슴은 늘 두근거리기를 바란다


그렇게 허물을 벗고
단 한 번의 해가 오로지 나에게로 올 것을 믿는다
나는 달이 뜨는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 박두규 시인은 1956년 전북 임실 출생으로 1985년 <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과꽃 편지>, <당몰 샘>, <숲에 들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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