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끔은 宥罪한 과거가 보인다 - 고철

마루안 2015. 10. 12. 07:01



가끔은 宥罪한 과거가 보인다 - 고철



문 밖 출입이 두려운 요즘도
가끔은 유죄한 과거가 보이지
갈기 부러진 허공 저 편
실근한 실체들은 잘 보이지 않는 법


홍역질에 지친 쉽게 얻은 망각병처럼
사들 듯 한 산바람만 깡마르게 술렁이는
마른 눈 육중히 쌓인 최북단 서부전선
금 그어진 산 길을 따라 나섰다


따순피 괴인 호수가 보였다
지척이 천리인 산 넘어 산이 보이고
들 넘어 들이 보였다
암갈색 관목들이 들쩍하니 심호흡을 하면


세상은 온통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무던히도 살아 오지 않았던가
그 옛날 몽고반점 한 무리
이 켠 저 켠 뵈이기도 하련만


더는 열려주지 않던 사금파리 같은 일상을
지우고 싶다
빌고 비는 마음으로
지극정성 담고 담아
그렇게 은밀했던 궐기와 이상을 지우고 싶다
골짜기 어딘가에선
비릿한 촛농이 녹고
탄피가 녹고
팔부능선 저 너머
취드렁이 춤 추는 소리도 들리고



*고철 시집, 핏줄, 다인아트








소리의 윤곽 - 고철



허술한 바람이 흔들리고 있을 때
가르마 없는 청년이
늙은 아저씨가 되어
고궁 담벼락에 허접살림 차려놓고
길 중처럼 운다
쇠파리 꼬여드는 버려진 한 낮
시궁의 물소리가
첨벙첨벙 울 때
기억이나 추억이
살아 온 궤짝에 묶여
정오에 묶여
이정 잃은 마을에서
거스름없이
마구 바람이 흔들릴 때
바람의 몫이려니 하면서도
진흙속을 뒹구는
막장 한 채





# 고철 시인은 1962년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95년 <한겨레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핏줄>, <고의적 구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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