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이를 먹는 슬픔 - 김용락

마루안 2015. 10. 11. 19:18



나이를 먹는 슬픔 - 김용락

 
 

뜨락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문득 세월이 흐르고 한두 살씩
나이를 더 먹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잎이 청정한 나무처럼
우리가 푸르고 높은 하늘을 향해
희망과 사랑을 한껏 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잔하고 영혼이 늙어서가 아니다
또한 죽음 그림자를 더 가까이 느껴서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마음 속 깊이 믿었던 사람의
돌아서는 뒷모습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하는 쓸쓸함 때문이다
무심히 그냥 흘려보내는 평범한 일상에서나
혹은 그 반대의 강고한 운동의 전선에서
잠시나마 정을 나누었던 친구나
존경을 바쳤던 옛 스승들이
돌연히 등을 돌리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나이를 먹기 전에는 모르던 일이었다
돌아서는 자의 야윈 등짝을 바라보며
아니다 그런 게 아닐 것이다 하며
세상살이의 깊이를 탓해보기도 하지만
나이 먹는 슬픔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벽처럼 오늘도 나를 가두고 있다



*시집,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창작과비평

 







가을의 바다 - 김용락
 


중년의 사내가
마음 속 깊은 상처 하나를 안고
백사장에 앉아 가을의 바다를 본다
바다는 지난 여름의
격렬한 감정이나
불면과 고통으로 더 이상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혹은 세월처럼
혁명도 이데올로기도
저만치 멀어져버린 것 같은
오늘의 견딜 수 없는 이 쓸쓸함
그러나 그 속에서 패배를 배우고 인생의 겸허를 느껴보자
나도 이제는
가을의 바다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
물러날 때의 쓰린 비애를 제대로 배워보자


 



# 지난 여름의 이야기다. 장마가 막 끝나갈 무렵의 어느날 한동안 소원했던 선배 하나와 북한산을 올랐다. 나보다 훨씬 산을 많이 탄 선배이건만 요즘 체력이 많이 딸린다며 엄살을 부리는 선배를 구슬려 다소 험한 코스를 택했다. 산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가. 해가 기울어 가는 능선에 앉아 멀리 아파트가 늘어선 시내를 내려다 보던 중에 선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봐. 갈수록 이런 코스 오르기가 체력도 딸리고 또 겁도 나니 말야."
"선배는 어쩔 때가 가장 나이 먹는 슬픔을 느끼는 편이야?"
"음,,, 언젠가부터 미장원보다는 이발관이 편해지더니 머리 염색을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아있을 때?,,"


그것이 나이 먹는 슬픔이라면 나도 곧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무언가 울컥 올라옴을 느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가을을 기다렸고 해질녘이면 뒷산에 올라 발갛게 물들어가는 바다 바라보기를 좋아했던 염세적인 소년이 어느덧 중년이 되었으나 다만 나이를 먹어갈 뿐 여전히 철은 들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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