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만 년 후의 가을 - 강윤후

마루안 2015. 10. 8. 00:27



이만 년 후의 가을 - 강윤후



인류가 사라진 세상에 낙엽이 지고
소름 돋도록 맑은 하늘 아래
새로 지구를 떠맡은 종족의
사랑과 평화가 실하게 영근다.
새 종족이 가꾼 열매는
인류가 끝끝내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
그들은 인류의 본보기 삼아
싸움의 불씨가 되는 편가름을 꺼렸고
뺏고 빼앗음을 부끄럽게 여겨
베풀고 나누기를 즐겼으며
지구의 주인됨을 자만하지 않아
물과 흙과 나무와 풀과 짐승을 함부로
다스리고 거느리기보다는
그것들과 더불어 살기를 바랐으니
결 고운 햇살 누리에 골고루 퍼지고
행복은 어디서나 뿌리내렸다. 그러나 미래는
그들에게도 불길한 예감으로 남았기에
후손들을 경계(警戒)하기 위해
사랑과 평화의 열매를 오래도록 지키기 위해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썼다.
길이 반성의 거울이 되어야 하므로 그들은
인류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가능하면
더럽고 추하게 적어나갔다
인류가 한때 품었던 꿈과 희망은 뒷전에 밀어둔 채
기아와 살육과 전쟁과 증오의 나날들을
낱낱이 들추어 욕하고 비웃었다.
그 가을이 깊어갈 무렵, 책으로 출간되어
널리 읽히기 시작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너절하게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연명하던 인류는
그나마 멸망할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지성








가을 화계사(華溪寺) - 강윤후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서 자꾸 낙엽은 지는지
괜히 호주머니가 뻑뻑해지고
구두 밑창이 맑게 닦여 사뭇 걷기 어려웠다
세상에는 텅 빈 28번 버스도 있고
그 빈 구멍에 실려
달그락거리며 도착한 산의 초입에
중절모 같은 찻집이 길 쪽으로
귀가 빠져 있기도 하건만
산을 오르기 위해
그런 세상의 뚜껑들을 새삼 닫아야 했다
쏟아지지 못한 가을이 팽창하기만 하여
숨가쁜 산
말을 하지 않아도 소란한 발자국소리
부호가 되어 끼리끼리 교신하고
저무는 햇살이 간지러운 듯 나무들
몸을 비틀며 더 홀가분해지려 했다
혼(魂)이 떠난 시신(屍身)처럼
절마당에는 싸리비 자국이 속절없이 식어 있고
뚜렷한 여백으로 빠져나간 그 화계사는
어디를 떠다니기에
정녕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서 또
지는지 낙엽은 지는지
화계사가 벗어던진 허물로는 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버텨온 수천 년을 허물며 바위들
죽은 껍질들을 감아 허무하게 굴러내릴 듯하지만
담배를 피워도 연기는 산이 토해내고
샘물을 떠마셔도 산의 혈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
집 없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지나가는 스님의 옷자락 끝에서
무엇인가 나부끼며 닦이는 듯싶은데
어느새 어둠을 끌어당기는 법고 소리
놀러 나간 화계사를 다급하게 부른다
굳이





# 이 시집은 20년 전인 1995년 10월, 문학과지성 시인선 170 번으로 나온 그의 첫 시집이다. 오래된 시집을 들추는 이 가을이 시린 가슴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책 날개에는 시인의 소개를 이렇게 하고 있다. 시인 강윤후씨는 1962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했으며 현재 대전 중경공업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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