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혹 - 조인선

마루안 2015. 10. 7. 08:39



유혹 - 조인선



화장하는 여인의 몸이 권태롭다
세상을 뒤덮을 권태가 지긋지긋해
내 몸 하나 움직이기 힘들다
먹고 사는 게 권태롭다면
그 놈은 필시 권태가 뭔지 아는 까닭이니
새가 얼마나
꽃이 얼마나 권태로울까
나 이제 사창가에 몸을 두어도
권태로운 세상은 변함이 없고
땅을 치며 구걸을 해도
땅을 치며 구애해봐도
내 몸엔 필시 거지 근성이 깊게 뿌리박아
화장하는 여인의 뒤통수를 내리쳐
붉은 피를 쏟아 부어도
권태란 놈이 보들레르의 귀에 닿아도
그대 심장을 뚫고 들어가진 못하겠다고
두 눈 감고 권태가 기어나온다
빛과 어둠 사이로



*시집, 황홀한 숲, 문학과지성








자화상 3 - 조인선



눈 뜨면 늙는 줄 알면서도 들어온다
이 안에서 났으니
결국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빛의 열기에
언어의 비늘이 반짝일 때마다
끝없이 덮여 있는 권태가 싫어
여기 왔지만
이곳은 홀로 둘이 되는 곳
이 거대한 묘지에서
사고의 괴로움이 즐거운 생이라
죽음도 멀게만 느꼈었기에
돌아보니 하루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았다
작은 어항 속
그저 온몸 흔들어
내 속의 나를 꺼내 떠오르던 이곳은
누가 있어 내 사랑 하나로 할까






이 시집에는 각 부마다 다섯 개의 자화상이 맨 앞에 실렸다. 자화상 1, 자화상 2,,,, 그리고 각 부 마지막엔 입, 손, 귀, 눈, 발을 씻다가 실렸다. 입을 씻다, 손을 씻다,,, 완벽한 시집 구성이다. 시인이 정한 각본에 의한 완벽한 구성,, 어쩌면 이 시인은 완벽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지독한 완벽증,, 그것이 때론 자신을 너무 괴롭게 하지 않았을까. 그는 시 없이 못 산다는 걸 너무 잘 알면서 정신병인 줄 너무도 모른다고 자화상에서 밝히고 있다. 시만 갖고 못 살기도 하지만 시 읽기 없이 못 사는 것도 일종의 병이다.


*시인의 말


마음을 보여준 것이 시가 되고
그날 이후 난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무능이 시 사랑의 조건이 되고
외로움이 이별을 막는 구실이 됐다.
허나 시인의 길은 다람쥐 길.
사랑은 뱀처럼 위험하다.
언제쯤 나도 절망에 익숙해질까?
어느덧 그 상처에서 꽃이 핀다니
후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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