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관 - 한우진

마루안 2015. 10. 5. 05:10



낙관(落款) - 한우진



노루꼬리가 비스듬히

매화노루발을 스치었다


상석(床石)에 마른 붓질 몇 번


나는 무릎을 바치고 있었다

내가 눈뜬장님이고 혼자라고

달이 슬그머니 겹친 내 손등을 핥았다

그때였다

노루가 높이 뛰어올라

달을 된통 들이받았다

둥근 통에서 출렁대던 달빛이 쏟아졌다

나는 노랑페인트를 온통 뒤집어썼다


묘지에도 내 등때기에도

노루발바닥이 찍혔다



*시집, 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완결(刓缺) - 한우진



눈썹 끝에 인두 올려놓고

일없다, 울 일 없다

마음에 빳빳하게 풀먹여가며 더딘 사랑을 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용없다 꽃!

풀이 바람에 온몸을 벼리는 동안


새가 하늘에 내 천(川)자를 천 번이나 긋는다

새의 날개가 닳는다


일없다, 사랑 없다!

닳는 것은

강을 받아쓰는 갈대만이 아니어서


몽당연필 같은 나도

당신의 책받침을 끼고 어깻죽지가 아프다






# 나름 많은 글을 읽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한자 실력이 달려 이 刓缺이라는 단어는 이 시를 읽고 알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나무, 돌, 쇠붙이 등에 새긴 것이 닳아서 흐려지거나 모서리가 깨어져 그 모양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말한단다. 어려운 단어 깨우치고 나니 시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자고로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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