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落款) - 한우진
노루꼬리가 비스듬히
매화노루발을 스치었다
상석(床石)에 마른 붓질 몇 번
나는 무릎을 바치고 있었다
내가 눈뜬장님이고 혼자라고
달이 슬그머니 겹친 내 손등을 핥았다
그때였다
노루가 높이 뛰어올라
달을 된통 들이받았다
둥근 통에서 출렁대던 달빛이 쏟아졌다
나는 노랑페인트를 온통 뒤집어썼다
묘지에도 내 등때기에도
노루발바닥이 찍혔다
*시집, 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완결(刓缺) - 한우진
눈썹 끝에 인두 올려놓고
일없다, 울 일 없다
마음에 빳빳하게 풀먹여가며 더딘 사랑을 쓰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소용없다 꽃!
풀이 바람에 온몸을 벼리는 동안
새가 하늘에 내 천(川)자를 천 번이나 긋는다
새의 날개가 닳는다
일없다, 사랑 없다!
닳는 것은
강을 받아쓰는 갈대만이 아니어서
몽당연필 같은 나도
당신의 책받침을 끼고 어깻죽지가 아프다
# 나름 많은 글을 읽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한자 실력이 달려 이 刓缺이라는 단어는 이 시를 읽고 알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나무, 돌, 쇠붙이 등에 새긴 것이 닳아서 흐려지거나 모서리가 깨어져 그 모양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말한단다. 어려운 단어 깨우치고 나니 시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자고로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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