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긍정적인 생각 - 조항록

마루안 2015. 10. 6. 08:25

 

 

긍정적인 생각 - 조항록

 


이런 건 끝내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믿는 시절을 지나
이런 게 다 사람 사는 거라고
믿은 시절을 지내다 보면


육체에 정신을 맞추기도 하므로
구두에 발을 맞추는 것쯤이야


발등에까지 나잇살이 올라
조금 작아진 구두를 앞에 두고
쓸데없는 호기를 부리는 것은
이제 그만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당신 말씀의 걱정을 모르지 않기 때문


발뒤꿈치 분홍빛 속살에 눈감고
피멍 들어 이내 뽑힐 발톱을 외면하면
각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어도
고통을 어떻게든 끝나게 마련이므로


물집은 희망에 부대껴 생겨나는 꽃망울
희로애락에 호들갑스럽지 않은
굳은살의 여유는
아무나 누리는 사치가 아닌 것


이만큼 길을 걸어온 사람은
계속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이므로
각설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지나가면 허기지고 다가오면 망설임뿐인 것이
다 사람이 걸어가는 길


고통의 식민지가 발의 숙명이라면
구두를 구겨 신지 않는 것은 마지막 고집

 


*조항록 시집, 근황, 서정시학

 

 

 

 

 

 

가을 저녁 - 조항록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변덕이 있어
춘란 위로 눈이 내리고
한로(寒露)의 짧은 땡볕에 한 번 더 곡식이 익고
시절과 시절 사이에는 연민이 있어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기도 하지만
영영 떠나야 할 시각은
발소리를 감추며 닥쳐오게 마련이다


하늘이 붉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젊은날의 기러기들
날아가며 하혈(下血)을 했나
둥근 달이 심장처럼 두근거린다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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