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과 운명 - 백무산

마루안 2015. 10. 5. 08:45



사랑과 운명 - 백무산



갈 수 없어 못 갔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꽃피는 사랑과 종말에 대해
내 어찌 청맹과니로만 살았겠습니까
가슴 한귀퉁이 무너지는 눈물이 없어
돌아섰겠습니까


그곳은 차라리 길이었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길은 붙잡을 수 없으니
내 어찌 무어라도 붙잡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세상의 사랑과 종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이미 존재하는 길은 머무는 길입니다
머물러 할 수 있는 일은 소유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나날은 열겹 스무겹 자신을 방어해야 할 뿐
이내 사랑은 식은 찻잔처럼 저물고 오직 머무름의
안락이나 되돌아보는 휴식에 노을은 지고 맙니다
아아 설사 내 모든 것이 잘못된다 해도 한파처럼 엄습해올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유혹을 내 어찌 떨쳤겠습니까
운명을 믿지 않으나 사랑에 대해서는
운명이랄밖에 달리 무어라 하겠습니까


가슴 미어지는 나날을 택했습니다
꽃피듯 한번씩 돌아오겠지요
다함이 없는 그리움으로 돌아오겠지요



*시집, 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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