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근황 - 정병근

마루안 2015. 10. 1. 23:11



근황 - 정병근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이 없었다
잃어버리기 위해 라이터를 샀다
그 많던 볼펜은 다 어디로 갔는지
겨울은 아는데 여름은 모른다고 했다
카페 봄에 가서 가을을 물었다
전화는 선택적으로 묵살되었고
간판들이 일부일처를 비웃으며 지나갔다
뒤따라 온 자책과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부재를 알리는 약속이 도착했다
나를 베어 문 그의 웃음이 재빨리
영정 사진 속으로 들어갔다
흩어지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진동이나 문자는 종종 그들의 명분이 되었다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아는 너와
너보다 더 많이 너를 아는 내가
불행한 풍자에 몰두하는 동안
등 돌린 말들이 서로를 누설했다
흥건한 흉몽의 문을 두드리며
나라는 소문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예언자 - 정병근


 
등산가에겐 등산 장비가 필수이듯이
그에게도 갖춰야 할 패션이 있는 것이다
네모난 확성기를 옆구리에 차고
붉은 십자가와 재림 예수 어깨띠를 두르고
중세의 병사처럼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 적힌
마분지 쪼가리를 앞뒤로 방패처럼 붙인
그가 서울역 광장을 배회하면서 외치는 것은
말하자면 종말을 대비한 생존의 비법일 텐데
소음과 복음은 글자 한 자 차이인가
아닌가, 왕왕거리는 소리의 테두리 때문에
내용은 고사하고 도무지 듣고 싶지가 않아
아무도 믿지 않을 때 종말은 찾아올 것이고
종말이 온 후에나 말씀은 이루어질 것이니
늦고 늦었다 그의 저 닳고 때 전 구두 속에는
얼마나 지독한 발 냄새가 숨죽이고 있을 것인가
제발 듣지 마라 믿지 마라 반성하지 마라
뒤돌아보는 순간, 당신은 소금 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그를 생각한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 곤한 몸 눕히는 그를
새벽에 장비들을 챙기고 다시 집을 나오는
초라한 몰골의 한 사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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