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이병률

마루안 2015. 8. 25. 22:57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이병률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한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이병률 시집, 찬란, 문학과지성

 

 
 


 
 
일말의 계절 - 이병률



아무도 밟지 말라고 가을이 오고 있다
무엇이든 훔치려는 손을 내려놓으라고 가을은 온다
힘 빠지는 고요를 두 손으로 받치듯
무겁게 무겁게 차오르는 가을


가을이 와서야 빨래를 한다
가을이 와서 부엌불을 켜고 국수를 삶다가
움켜진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먼 길에서 돌아와 듣는 오래 전 남겨진 메세지
우편물이 반송되었으니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마련할 것이 없었으므로
생애 단 한 번 우체국을 찾아 보낸 것이 있다
계절이 오는 것도 다 받아내지 못하는 우체국으로
보낸 것이 되돌아왔다


되돌려 받기를 잘했다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생의 부분을 보냈다


파는 것인지 가져가라는 것인지
길 앞에 쌓아놓은 가을 낙과를
하나쯤 가져가도 좋겠다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