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 박이화

마루안 2015. 8. 18. 23:58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 박이화 



꽃 지고 나면 그 후는
그늘이 꽃이다


마이크도 없이
핏대 세워 열창했던 봄날도 가고
그 앵콜 없는 봄날 따라
꽃 지고 나면
저 나무의 18번은 이제 그늘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한 시절
목청 터져라 불러재꼈던 흘러간 노래처럼
꽃 지고 난 후
술 취한 듯 바람 등진 채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부르는 저 뜨거운 나무의 절창


그래서 저 그늘
한평생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시절만큼 꼭 그 젖은 얼룩만큼 나무는 푸르른 거다


설령 사랑도 꽃도
한 점 그늘 없이 피었다 그늘 없이 진다 해도
누군가 들었다 떠난 퀭한 자리마다
핑그르 눈물처럼 차오르는 그늘


꽃 지고 난 그 후는
모든 그늘이 꽃이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번진 검은 눈물꽃이다

 


*시집, 흐드러지다, 천년의시작








시절, 시절들 - 박이화



풀밭만 보면
무작정 달려가 얼굴을 묻던 시절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젖배를 곯았고
그 후로 동냥젖에
믿을 수 없지만
소젖도 먹고 염소젖도 먹고 컸다는 후일담 때문인지
풀밭만 보면 젖 냄새 맡듯
풀 냄새 맡던 시절이 있었다
저물도록 뒤져도 찾을 수 없던 네 잎 크로버
어쩌면 나는 네 잎 클로버보다
젖꼭지마냥 말랑말랑한 토끼풀꽃을
더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조물조물 그 꽃을 만지며
애기똥풀 옆에서
나도 모르게 단잠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해는 지고
한 무더기 별빛이
염소똥처럼 와르르 쏟아질 때까지
그 너른 풀밭이 다 내 것이던
 

그 시절, 시절이란 말은
지금도 내겐 초록 풀밭 같아
풀물처럼 지워지지 않는 새파란 얼룩이 있고
토끼풀꽃보다 더 비릿한 날비린내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