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빚진 세상 - 이기철

마루안 2015. 8. 20. 22:56



빚진 세상 - 이기철



걸어가면 꽃 핀 세상 만나리라고
내 신발은 풀물 든 초록 길 넓히며 걸어왔다
생각의 금은을 만지며 때로
내 손은 분홍 연사를 쓰기도 했지만
저 패랭이꽃같이 낮고 슬픈 세월의 잡기장들, 오욕의 손수건들
손때 묻어 글자마저 지워진 오랜 날의 일기 쪽들
내게도 생의 설계가 있었던가
가건물의 처마는 따뜻했던가
결코 궁전이 될 수 없었던 젊은 날
내 오막살이의 서까래들
저 가을 나무만큼이나 저 내릴 잎새라도 있었던들
차라리 내 후살이 덕석만 한 햇볕 한 됫박이라도
받아두었겠지만
이제 꽃 핀 세상, 화안한 뒤안길
어느 행간에 무릎 끓어
내 빈한을 용서받을 수 있겠는지
거기 고삐 풀어놓고 방목할 수 없는
물어도 대답없는 안부 뒤의 세월



*시집,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어깨 때리는 바람 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 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 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삶을 사랑하자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 할 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