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중년의 출구 - 조항록

마루안 2015. 8. 25. 22:51



어느 중년의 출구 - 조항록



그의 출생은 관용서류 몇 장에 공인됐다
그때부터 그는 목마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미움이나 인정이나 깊어지면 고단해서 호흡 조절도 조심스러웠다
전열을 가다듬고! 상대는 어디 있는가?
황야를 달리다가 때로는 돌부리에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서는 얼굴 빨개지며 손바닥이나 훌훌 털었다
경건한 의식으로 감정을 통제했다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는 거세마였다
갈기를 휘날리며 달릴 줄은 알았어도
밤이면 울부짖던 그에게 황야는 갈수록 험난했다
아내와 자식들은 그것을 짐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구는 빵덩어리였고 겨우
매일 부스러기를 얻어오는 일이 임무는 그에게
모두들 채찍을 휘둘렀다 솟구치던 피엉킨 살점
그는 자신의 생애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완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이란
造花를 꽂아둔 꽃병 같은 것이었고
아무리 돌아와도 먼길 끝에 낯익은 버스 번호판 같은 평온은 없었다
그런 그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더욱 반듯하게 정돈되어야 할 나이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석간신문 한구석에 숨어 잠들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 문고리를 돌렸고
황야에서 사라졌다
여전히 황야에는 상심 없이 해가 지고 해가 뜨고
붉은 도장 몇 개로 그의 출구를 공인했다



*시집, 지나가나 슬픔, 천년의시작








내가 있으리라 - 조항록



먼 훗날 좁은 길목에서 펼쳐보는
그대 추억의 안주머니에
이니셜 같은 몇 조각 파편
불현듯 내가 있으리라
사는 일에 충혈된 그대 외투깃 세우고
남루가 잔뜩 깔린 흐린 길을 돌아보는 순간
그 모든 해찰스런 아픔에 서걱서걱
소금기둥으로 변할 내가
지금 모습 그대로 그대 품에 간직되어 있으리라
추억은 대개 묵을수록 살가워져
얼룩진 슬픔도 닦아내곤 하는 순결한 손길
내가 빚어내는 잔잔한 사실들은
격자무늬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보고 싶어 그대 한번쯤 못내 그리워도 하리라
북구의 짙은 잿빛 하늘이 밀려오는 이 시절
음울한 침엽수림을 지나 작은 호숫가
톱밥난로를 지피며 함께 가슴을 데우거나
북극성과의 설레는 교신을 꿈꾸는 오두막
다시 느끼리라 녹슨 시간의 창틀을 문지르며
언뜻 불어오는 빛바랜 바람결 속
얌전히 떨어져내리는 몇 장 나뭇잎으로
평화롭게 내가 있으리라





# 쓸쓸하지만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은 시가 마음을 사로 잡는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자서 또한 딱 내 마음이다.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이해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가끔 그 신열의 골짜기에 잠겨
<올드랭 사인>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