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뼈가 투명해질 때까지 - 이원규

마루안 2015. 8. 16. 22:56



뼈가 투명해질 때까지 - 이원규



말복의 지리산 해발 900미터
하늘 아래 첫 동네 가까이
나만의 비밀 계곡에 들어가
겨울 신갈나무처럼 훌훌 옷을 벗고
가랑이 사이 산바람이 지나는 거풍을 한다


찬물에 식은 밥을 말듯이
목욕재계를 하고는
바짝 달아오른 마당바위에 드러누우니
물소리, 계곡 물소리는
귓구멍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를 파고들어 내장 속으로 흐른다
창자가 터엉 비도록 씻어내고
또 씻어내는 날선 활인검의 서늘한 빛
내 생애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적 있었던가
입산 전의 세월은 내내 소화불량 아니면 변비였다


마침내 뱃가죽이 얇아져
배를 움켜쥐면 손끝에 등뼈가 잡히도록
허기가 지고 또 허기가 질 때쯤
차고 맑은 물 한모금의 충만
으슬으슬 그녀의 온기 그립기도 하지만
그마저 해발 300미터 아래의 이야기일 뿐


뼈가 좀 시리면 어떠랴
겨울 나이테처럼 단단해지거나
고드름처럼 좀 더 투명해질 수도 있는 법
거풍에 목욕재계를 하며
오늘 하루도 곡기를 끊었다
입산 십 년의 뼈가 조금 더 투명해질 때까지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실천문학사








탁좆  이원규



오해하지 마시라
탁좆은 탁족(濯足)의 오자가 아니다
한여름 계곡물에 발만 담그면 탁족이지만
새벽마다 불끈 일출 조짐을 보이는 불의 알까지
푸덩덩 찬물에 말면 탁좆이다


오늘도 피아골로 숨어들어
거풍에 탁좆을 하다
마당바위 찜질방에 드러누워
햇볕 사우나로 젖은 몸 말리는데
어허라 열두어 걸음 위의 계곡
긴 머리 산중 처녀도 훌러덩
탁좆, 아니 탁십(濯十)을 하는 게 아닌가


몽정기의 소년처럼
후다닥 옷가지를 걸치고
연이어 너덧 개비 담배를 피울 때까지
스물댓 살의 산중 처녀 여여하니
꼭 무슨 죄인처럼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기다릴 뿐


이윽고 젖은 머리카락
산바람 스치는 처자에게
이보씨요, 아가씨! 등산로에서
훤히 보이는 데서 꼭 그래야 쓰겄소?
농을 던지자마자
차암, 보는 지가 꼴리지 내가 꼴리나!


장풍 일격을 날리며 청솔모처럼
통통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닌가
멍하니 불의 알이 오그라지도록
아직 젊은 흑발 대선사를 보긴 보았던 것이다






# 이원규 시인은 1962년 경북 문경 출생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계명대 경제학과를 수학했다. 1984년 <월간문학>에 1989년 <실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빨치산 편지>,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