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당신을 향해 피는 꽃 - 박남준

마루안 2015. 8. 9. 21:38



당신을 향해 피는 꽃 - 박남준



능소화를 볼 때마다 생각난다
다시 나는 능소화, 하고 불러본다
두 눈에 가물거리며 어떤 여자가 불려 나온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니 늘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여자가 나타났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
몸 기대어 등을 내거는 꽃
능소화꽃을 보면 항상 떠올랐다
곱고 화사한 얼굴 어느 깊은 그늘에
처연한 숙명 같은 것이 그녀의 삶을 옥죄고 있을 것이란 생각
마음속에 일고는 했다


어린 날 내 기억 속에 능소화꽃은 언제나
높은 가죽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연분처럼 능소화꽃은 가죽나무와 잘 어울렸다
내 그리움은 이렇게 외줄기 수직으로 곧게 선 나무여야 한다고
그러다가 아예 돌처럼 굳어가고 말겠다고
쌓아올린 돌담에 기대어 당신을 향해 키발을 딛고
이다지 꽃 피어 있노라고


굽이굽이 이렇게 흘러왔다
한 꽃이 진 자리 또 한 꽃이 피어난다



*박남준 시집, 적막, 창작과비평








먼 강물의 편지 - 박남준


 
여기까지 왔구나
다시 들녘에 눈 내리고
옛날이었는데
저 눈발처럼 늙어가겠다고
그랬었는데


강을 건넜다는 것을 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길에 눈 내리고 궂은 비 뿌리지 않았을까
한해가 저물고 이루는 황혼의 날들
내 사랑도 그렇게 흘러갔다는 것을 안다
안녕 내 사랑, 부디 잘 있어라






# 사랑의 유형은 몇 가지가 있을까. 흔히들 영화나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출생의 비밀이나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사랑도 있을 것이고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인 탓에 시큰둥했다가도 정작 그런 장면이 나오면 외면하지 못 하고 눈을 고정하게 된다.


이런 사랑일수록 집안의 반대가 극심한 것도 공통점이다.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랑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법, 이 시에 나오는 사랑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소극적인 사랑도 나름 아름답게 느껴진다. 혓바닥을 뽑아 삼킬 것처럼 격렬했던 키스도 지나고 나면 아련한 추억이 되지만 사랑이 다칠까 한 발짝 물러서는 사랑 또한 지나면 애틋해지는 모양이다. 어쨌든 사랑,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