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 처음처럼 - 김수열

마루안 2015. 7. 24. 22:58



우리 처음처럼 - 김수열


 
꽃이 진 자리에
꽃은 피지 않는 것인가
그대 한 떨기 통꽃으로 진
그 자리엔 스산한 바람 그리고 바람


더불어 꽃이 되자던
그래서 한아름 꽃무리 이루자던
칼날 선 언약들은
세 치 혀끝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더러는 어쩔 수 없어 길을 떠났다
마침내 꽃이 되어
그대 진 자리에 선연히 다시 피마고
다짐하고 다짐하며 소 울음소리로 길 떠났다


더러는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세월이 가면 그대도 가고


그대가 남긴 그림자도 가고
쥐꼬리만한 부끄러움이야 손으로 가리면 그뿐
황망하게 뒤돌아섰다
향냄새 채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길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빈 산 빈 하늘
아무리 뒤돌아봐도 텅 빈 하늘


그래 이제 시작이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거다
빈 들판 가득
바람으로 달려가는 거다
가서 꽃으로 피어나는 거다
때가 되면



통꽃으로 떨어져
빈 산 가득 꽃물결 이루는 거다
빈 하늘 향해 꽃향기 날리는 거다
우리가 만난 첫날 그 밤처럼
뜨겁게 일어서는 거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시집,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실천문학사

 


 




쉰 - 김수열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줄 알았다
설운 서른에 바라본 쉰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다
비틀거리며 마흔까지 왔을 때도
쉰은 저만큼 멀었다


술은 여전하였지만
말은 부질없고 괜히 언성만 높았다
술에 잠긴 말은 실종되고
더러는 익사하여 부표처럼 떠다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벗들은 술병과 씨름하다
그만 샅바를 놓고 말았다
팽개치듯 처자식 앞질러 간 벗을 생각하다
은근슬쩍 내가 쓰러뜨린 술병을 헤아렸고
휴지처럼 구겨진 카드 영수증을 아내 몰래 버리면서
다가오는 건강검진 날짜를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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