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 오민석

마루안 2015. 8. 16. 22:51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 오민석



누구는
절반의 희망과
절반의 절망을 말하지만
지금 할 일은
참혹한 시간 속으로 더 들어가는 것
애인들은 등을 돌리고
꽃들은 마침내 졌다
지금 할 일은
믿음, 희망, 미래, 이런 단어들을
잠시 버리는 것
더 혹독하게 살의 냄새를 맡는 것
유령들과 작별하고
염통의 지도를 다시 읽는 것
아, 또다시 삶에 속은 자는
지게를 지고 다시 생계를 향해 가네
지금은 더 참혹하게 무너질 때
알몸의 비극과 결혼할 때
손쉬운 작별들과 작별할 때
그러니 벗들,
꽃피는 봄날에
더 참담하게 만나자



*시집, 그리운 명륜여인숙, 시인동네

 







그리운 명륜여인숙 - 오민석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이십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 좋은 시를 발견한 기쁨에 눈이 번쩍 뜨인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고 그리워진다. 그런 시절을 죽지 않고 어떻게 건너 왔을까. 치열함보다 비겁함이 더 많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사는 게 고맙고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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