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열애의 나날 - 김경미

마루안 2015. 7. 27. 23:29



열애의 나날 - 김경미



휘어진 영혼은 아프다. 아니 아프다 못해 처음 와 닿는
새벽 빛처럼 시큼시큼 가슴이 저리다.
스쳐 지나가는 버스 차창에서, 건물에 반사되는 어스름 저녁,
역광 속에서 문득 문득 생각나는 상처 받은 영혼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몇 겹의
어두은 회전 유리문 같은 곳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
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휘어진 영혼이 굴절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상처 받은 그들 영혼이 위안 받는 사랑법을
그것을 과연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연하의 사랑 같은 것
대각선으로 마주치는 눈빛 같은 것
들켜서는 안 될 만남 같은 것
사람이 그리워서니 용서해다오.
술만 마시면 혀 뒤로 발바닥이 튀어나오도록 토하고
또 엉긴다. 용서해다오 그대들
내 아는 사랑법이 괴로움 붙들고 늘어지는 비루(悲淚)뿐이니
왜 나는 이 세상 짐에 알맞는 어깨를 갖지 못할까?
진 짐도 없이 걸으면서 휘청대기는 잘 할까
그래도 끝내 날 모욕 않는 사랑아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아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