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마 첫날 - 김인자

마루안 2015. 7. 3. 23:20



장마 첫날 - 김인자



비가 추억추억 하고 내린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추억에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주전자에 끓인 물 또 끓이면서
더 늦기 전에 이 놈의 짝사랑 고백해야 하나 하다가
살다보면 닿을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한 것도 있는 법이지 하다가
남새밭에 애꿎은 고추꽃만 와르르 지겠구나 하다가
죄 없는 카페오레 빈 캔만 툭툭 발로 차다가
저 비 자꾸만 내려서 그래 그렇게 내 속 뒤집어 어쩌자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것을 트집 잡고 시간 죽이는 한 여자를 한심해 하다가
갑자기 내 생이 답답하고 쓸쓸해져
다시 소란 피우며 양철지붕 빗소리에 버럭 화를 내다가
양철지붕이 소란한 건 저놈의 얇은 성질 때문이지 하다가
설마 저 비에 무슨 영혼 같은 게 있어서 저럴라구 하다가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아직도 안 그치네 하다가, 하다가

 


*시집, 슬픈 농담, 문학의전당




 




혼자 먹는 밥은 슬프다 - 김인자



이승을 가로 흐르는 안개 사이에
저승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단골 식당의 영업시간을 놓치면
아예 눈꺼풀을 닫고 잠들거나
허기가 지나칠 땐
마른 빵조각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목젖을 따라
꺼이꺼이 울며 위벽을 할퀴던
마른 빵부스러기의 몸부림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또한 즐겁게 밥알을 삼키고 있을 때
그는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당당히 땀 흘렸던 것도 아니고
따스한 바람을 피해 골목 안으로 칩거하며
외등을 켜고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식구를 기다리는
따스한 바람이 부는 집 안을 훔쳐보며
그들의 돌아올 식구를 대신 기다려주기도 하면서
밤의 살이 그의 정체를 숨겨줄 때까지
골목을 서성거렸다


바람이 차가워져 그의 습기찬 방으로 돌아가면
해가 지고 또한 밤이 깊어도
기다릴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더욱 못 견딜 일은
그때 문득 우르르 달려와 전신에 퍼지는
파상풍 같은 허기
그 후에도 그는 오래도록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과 혼자 밥 먹는 일이 두려워
허기를 견디는 일이 잦았다
혼자 배를 불리는 일이 얼마나 목메이는 슬픔인지
뉘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집, 나는 열고 싶다, 인화


 



# 나에게는 묘한 습관이 있다. 세끼 밥은 안 먹어도 하루 석 잔의 커피는 마셔야 한다는 것, 가끔 바쁘다 보면 두 잔으로 넘어갈 때가 있지만 나중 그걸 알았을 때 공연히 손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담배 맛을 잃은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커피 맛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누구는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보면 되레 커피가 숙면을 이루는 수면제인지도 모른다. 특히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유난히 커피를 마시고 싶다. 혼자 먹는 밥은 슬플지 모르나 혼자 마시는 커피는 맛있다. 빗소리에다 음악을 한 스푼 넣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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