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新派), 백일몽 - 백인덕
나는 저 어두워가는 강둑, 키 낮은 풀밭 끝에
매인 낡은 배라면 좋겠네.
바닥 한 가운데 썩은 물에 던져진
뒤축 구겨진 구두 한 짝이라면
나는 더, 더욱 좋겠네.
나는 저 밝아오는 골목, 구정물 고인 담장 아래
기대 선 고물 자전거라면 좋겠네.
헐거워 덜렁대는 짐칸에 반쯤 꽂힌
살 죄다 부러진 우산이라면
나는 더, 더욱 좋겠네.
부풀어 오르는 한낮의 도심, 빌딩 숲 그늘 속
배고픈 사내들만 올려다보는 구름가,
나는 하늘 통문(通門)이었으면 좋겠네.
한 발은 문 안에, 그리고
끝내 뒤로 허리 꺾인 몸통을 바둥거리며
나는 이름이 지워지면 좋겠네.
얼굴이 아니라, 나에 관한 기억이 몽땅 어두워지면
나는 더, 더욱 좋겠네.
- 정말 죽어도 좋겠네.
*시집, 단단함에 대하여, 북인
나 울다 - 백인덕
산비탈 비스듬히 골목을 오르다
삐져나온 바위 그루터기에 앉아
울었다.
"시는 무엇이며, 인생은...."
바람이 담뱃불조차 꺼버린 어둠,
진득하게 고인 시간 속에서
누구는 나한테 '바다'를 보라 하지만
-거긴 죽음을 먹어치운 해파리만 가득하고
누구는 나한테 '꽃'을 보라 하지만
-색색의 표면 아래 들끓는 생식의 욕망 가득하고
누구는 나한테 '바다와 꽃과 시'를 보라 하지만
허기진 날 바람은 더욱 매섭고
아무래도 삶은 '라깡'이 아니라 '새우깡'인데
어둠이 깊어질수록 더 크게 웃는 당신,
당신들이여!
오 층 창가에 아주 잠깐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내 서러운 어둠을 위해, 이 밤도
울고 있음을....
돌 벽에 수없이 머리 찧어도 번개가 일지 않는
흐리고 흐린 밤, 비스듬한 골목을 오르다
마지막 담뱃불을 꺼뜨리고
나 실실 울다.
*시집,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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