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마루안 2015. 7. 5. 18:52



너무 아픈 사랑 -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상처적 체질 - 류근



나는 빈 들녁에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
갈 길 가로 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 번 빠져 다시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 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 만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 못 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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