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의 모든 저녁 - 유하

마루안 2015. 7. 3. 23:19



세상의 모든 저녁 1 - 유하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과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의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를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 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7월의 강 - 유하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서둘러 노을의 하늘을 갈아 치우는 잠자리의 눈동자
흔들릴 때마다 나뭇잎 속에 깃드는 푸른 신성 같은 것,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
덧없는 물살에 덧없는 마음의 지느러미만
하릴없이 놓아주다가


다만 물고기는 간데없고 남아 있는
비늘의 번득임만 안타까이 건져 올리듯
기어코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릴 때,
사라짐보다 더 아픈 정지의 순간이 오고
치자꽃 향기 밟으며
온 강에 멎을 듯 내려앉는 별빛 나비 떼
스쳐가는 바람이 거기 없었다면
송두리째 제 넋을 흔들어 구원받는 갈대를
누가 알기나 했으리

 





유하 시인 (본명 김영준)은 196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영화과를 졸업했고 1988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무림일기>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무림일기>,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천일馬화> 등이 있고 1995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뿐 아니라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으로도 유명한 재능있는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