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영화 제목 같기도 한 - 손수진
나고 자란 섬 한 번 벗어나 보지 못한 사내가
큰맘 먹고 서울 나들이를 한 거라
젊은 며느리는 효도 한 번 해볼 양으로
그럴싸한 한식집에 모셔 대접을 한 거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밥상머리에
조개 같은 것이 붙었는데
한 번 누를 때마다
어디서 선녀 같은 여자가 나타나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거라
햐! 요것 봐라
사내는 흑심이 생긴 거라
며느리 몰래, 슬쩍 떼어 주머니에 넣고서는
하루 더 묵어가라는 손을 뿌리치고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탄 거라
내려오는 내내 속주머니 깊숙이 들어 있는
동그스룸하고 납작한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불콰한 노을 속으로, 끄덕끄덕
묵지근한 몸을 흔들고 있는 거라
*손수진 시집, 붉은 여우, 한국문연
쓸쓸한 고백 - 손수진
며칠 전 동창이 며느리를 본다카는 청첩장을 받은기라
생전 양복 입을 일이 있어야제
유행지난 양복을 꺼내 입고
그래도 맹세기 아~들 결혼식 축하자린데 네꼬타이까지 메고 안 갔띠나
어예어예 물어 식장을 찾어가 유리문 앞에 섰는데
머리도 희끗하이, 배도 뽈록 나온, 어데서 마이 본 이가
내맨치로 빨간 네꼬타이를 메고 서가 날 보고 안있나
그래, 아는인 갑다 싶어가 악수를 청할라카이
아, 글쌔 그기 내모습이지 머로
세상에, 이리 떠리한기 어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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