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마루안 2015. 6. 27. 21:50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미래사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오랫동안 잊고 있던 윤동주 시인의 시를 다시 읽는다. 우리 문학의 길이 제 길로 들어서기는 커녕 현대시라는 개념도 미처 정립되지 않았을 당시 시인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미당이 가늘고 길게 살면서 온갖 영욕의 부침을 경험하고 천수를 누리며 문학을 완성한데 반해 일찍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의 짧은 삶이 그저 아쉽고 숭고할 따름이다.


예전에 내가 살던 시골에서 친한 동무의 형이 서시를 벽에 붙여 놓고 늘 애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중 들으니 이 형이 자살로 세상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사람도 전부 단명하는지도 모르겠다. 싯구 하나하나가 가슴을 쓸고 가는 서늘함 때문에 코끝이 시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시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