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짧고도 길어야 할 - 이선영

마루안 2015. 6. 6. 19:39



짧고도 길어야 할, - 이선영



그대와 나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 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어긋난 딱 두 개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도망가는 연인 - 이선영

-왜 그를 사랑하지?

-바람처럼 살고 싶어서요*



아름다움은 결핍이지
연초록 대나무숲을 둘러봐
새벽이슬이 채 베갯잇 戀情(연정)을 걷어가지 않은
아름답지만 눈도 없고 귀도 들리지 않아
게다가 우리를 들어올려줄 두 개의 팔 따위란 원시의 몸에서나 돋아난 것일 테니


그 동정 없는 장대나무숲을 우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있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버린 두 팔과 팔의 질기고 질긴 얽힘이니까
구부러진 골목길로 우리를 연거푸 몰아넣는 생활과 우리의 몸을 늘 거기 문설주로 세워 두는 의무에,
서로를 못 알아보게 될 때까지 늙어가고야 말 육체에,
우리는 지금 쫓기고 있는 중이지


대나무숲은 우리를 잠시 그 무관심 속에 풀어 놓지만
언제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흉기가 되어 날아올지 몰라
아름다움은 적이 취하면 금방 무기로 변하는 야속함이거든


내가 그를 따라 도망 중인 이유는
몸을 넘어뜨리며 바람처럼 내달리려는 그의 의지 때문이지
그가 나를 떨구어내지 않는 이유는
나만이 그 바람을 읽어 내는 야생화이기 때문이야


*장이머우 감독 영화 <연인>에서.
 




# 이선영 시인은 1964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오, 가엾은 비눗갑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평범에 바치다>, <일찍 늙으매 꽃꿈>,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