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풍선인형 - 손택수

마루안 2015. 5. 17. 19:57

 

 

풍선인형 - 손택수


나는 거리의 춤꾼 잔칫집이 있으면 어디서나 춤을 추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껑청한 키로 나른한 허공을 마구 붐비게 해주지
이벤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허리를 꺾었다 폈다, 어깨를 끝없이 출렁여대지
한번은 허수아비 대신 논가에서 춤으로 새들을 쫓기도 했어
뽑아서는 안 될 시장을 위해 선거 홍보를 하기도 했지
나는 거리의 춤꾼 몸속으로 쏴 바람이 들어오면
구겨진 몸을 펴 올리며 우쭐우쭐 일어서지
바람으로 단련된 이 팽팽한 근육을 좀 봐
내 몸속엔 아마 잔칫집들을 찾아다니며 타령을 하던 각설이의 피가 흐르나 봐
지하철에서, 여관에서, 노래방에서
24시간 환하게 불을 켠 비상구
표시등 위의 사람처럼 온 도시에 춤꾼들이 우글거리지
달리고 달려보지만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비상구를 품고
오늘도 간판을 새로 다는 거리
이 참을 수 없는 바람은 과연 어디에서 불어오는 걸까
춤을 멈출 수 없어 발목을 잘라버린 빨간구두 소녀처럼
저주를 풀기 위해 나는 나를 찢어버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피시식 찾아낸 구멍 어디로도 바람이 새어 나가지 않게
누군가 친절하게 반창고까지 붙여놓았군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거리의 춤꾼
다음 개업식장을 찾아 송풍기가 꺼지면
허공을 물속처럼 허우적거리며 무너져내려야 해
사정 뒤의 콘돔처럼 허물만 남은 몸으로 바닥을 짚고 고통스럽게 쿨럭거려야 하지
하지만 고통이라니,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고통도
몸을 구깃구깃 접어 마는 치욕도 딴은 춤의 일종
그런데, 바람은 또 어디에서 불고 있는 걸까


*시집,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시골 버스 - 손택수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이는 시골 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한참을 지나쳤다 투덜투덜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 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 올린 포플러와 내가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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