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 김승강
꽃이라 해서 늘 아름답지는 않지
모든 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딱 한 순간이라네
그 순간은 너무도 짧아
아무나 쉽게 눈치 채지 못하지
꽃 스스로도 마찬가진 것 같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눈치 채지 못하는
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 나는 운수가 좋았다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막 맞고 있는 꽃을 보았거든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그 순간에 부끄러워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거나
짐짓 먼 산을 보고 있었더라면
너무 억울해할 뻔했어
길을 갈 때
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지
나는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네
아무에게나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거든
나는 그때 꽃에게 쫓아가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네:
당신은 지금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게 낫겠네
혼자만 기억하기로 하겠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으니
아름다움은 꽃의 것도 아닌 모양이네
세상이 꽃으로 해서 잠깐 환해졌다 해도 마찬가지지
아름다움은 누구 것도 아닌 것 같아
내 손이 닿기도 전에 꽃잎에 맺힌 이슬이
몸을 던져 땅으로 투신하고 마는 것을 보면
*김승강 시집, 흑백다방, 열림원
별 - 김승강
초상집에 가면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번거롭게 한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떠든다.
밤하늘에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별 하나 걸어주는 것이 산 사람의 일이라고
초상집에 모인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별이라는 것이
감 따낸 빈 감나무 가지에 내 건 조등이다.
죽기 전에라도
자신의 주검을 치우러 온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떠들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있는 데서 죽고 싶지 않다.
산 사람을 귀찮게 하는 일 없이
산 사람들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일 없이
죽음을 예감하고 무리와 헤어져
자신만이 아는 곳으로 가서 죽는 코끼리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 하늘의 별이다.
바람에게. 새에게. 산짐승에게. 들짐승에게
물고기에게. 파리에게. 구더기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놓은
죽은 자들의 담백함으로
밤하늘의 별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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