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에게 - 서정춘

마루안 2015. 4. 25. 21:50

 

 

너에게 - 서정춘
-여하시편


애인아
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
새빨간 거짓말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
우리가 오래 전에
똑 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
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
똑 같은 물이고 흙이었을 때
우리 서로 옷 벗은 알몸으로
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였겠느랴
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
다시 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
우리 여기서부터 빨리 빨리
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
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녁이
허물없이 우리를 녹여 버릴 테니


*시집, 죽편, 시와시학사

 

 

 



接石 - 서정춘


내 눈부신 젊은 날은
고욤나무 생감만큼 떫었더니라

자그마치 나이 들고
섬뜩섬뜩 겁질도 잦아지면서
나이 든 저승 나비
허깨비도 더러 보았지만

淸川里 강물 앞
돌밭나루 큰 돌 앞에 눈인사를 하고
물 건너로 혼불처럼 날아간
저승 나비 눈치도 먼 발치로 보며
가까스로 그 돌 앞에
여물이 들더니라

이제는 기쁜 일로 천년을 살더라도
금이나 온같이는 빛나지 말자

눈먼 돌 귀먼 돌에
살붙이 혈육으로 접을 붙으면
캄캄한 그 안에서
모래알이 보이지
모래알을 적시는 물소리도 들리지

돌 속에
내 마음 놓아 버렸으니

 

 



*시인의 말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

흑!
흑!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날은 간다 - 기형도  (0) 2015.05.10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0) 2015.05.07
봄에 앓는 병 - 이수익  (0) 2015.03.25
어머니의 물감 - 원무현  (0) 2015.03.21
공중 묘지 - 성윤석  (0) 2015.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