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여관방 - 허수경
꿈에도 길이 있으랴 울 수 없는 마음이여
그러나 흘러감이여
제일 아픈 건 나였어 그래? 그랬니, 아팠겠구나
누군가 꿈꾸고 간 배개에 기대 꿈을 꾼다
꽃을 잡고 우는 마음의 무덤아 몸의 무덤 옆에서
울 때 봄 같은 초경의 계집애들이 천리향 속으로
들어와 이 처 저 처로 헤매인 마음이 되어
나부낀다, 그렇구나! 그렇지만 아닐 수는 없을까
한철 따숩게 쉬긴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몸은 쉬고 간다만 마음은? 마음은 흐리고 간다만 몸은?
네 품의 꿈. 곧 시간이 되리니 그 품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오오, 네 품에도 시간이 있어
한 날 낙낙할 때 같이 쓰던 수건이나 챙겨
어느 무덤들 곁에 버려진 꿈처럼 길을 찾아
낙낙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며 있으리라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정든 병 -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 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 없습니다
# 허수경 시인은 1964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 혼자 가는 먼 길>,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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