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막걸리집 미자씨 - 김명기

마루안 2015. 2. 26. 22:08



막걸리집 미자씨 - 김명기



막걸리집 이름이다 천상 막걸리 집을 위해 지어진 이름 같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 흙 바른 천장, 자그마한 방들, 그 방 안에 녹아들어 취한 사내들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건너편 작은 창고 양철지붕 위로 탕탕 떨어지는 설익은 땡감 소릴 듣다가
아, 듣다가


사는 게 얼마나 버거우면 저 푸르고 단단한 것들이 투신할까


한때 많은 푸르름들이 저렇듯 사라져갔지
단단하였지만 단단함만으로 살 수 없어 세상에 그 단단함을 내던졌던
죄 많은 소문이 그들을 묻었고 그리고 잊혀져갔지


그들의 푸른 피를 수혈 받은 세상은 이렇듯 안녕한데


오늘 밤
잘 익은 술에 취해가는 것
취한 술에 내가 푹 익어가는 것
어쩌면 그것은 모든 단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도 모른다


며칠째 비가 내린다


그 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깊은 어둠만큼이나 울울해진 가슴을 만지며
오지 않을 별들을 기다리며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문학의전당


 






삼보장 여관 - 김명기



저곳의 청춘은 허리 아래 깊숙이 박힌 초석으로 남았다. 날이 갈수록 쪼글쪼글해지는 바다를 향한 창문이라든지 한참 유행 지난 국적불명의 촌스러운 테라스에 마지막 그림자로 흔들렸던 이들도 이미 오래전 잊었을 것이다. 신새벽 막 도착한 기차에서 내렸거나, 한 번쯤 생의 유혹에 끌려왔거나, 혹은 그럴 듯한 이유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막막했을 때, 하나 둘 늘어가는 제 몸의 생채기 안으로 심지처럼 박히던 사람들을 묵묵히 태웠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절 역전 한 귀퉁이에 서서 숱한 비밀을 열람하는 동안 불안한 소문이 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여닫히던 두꺼운 유리문도 이제 함구 되었으므로, 그 속네에 자분자분 타들어 잿빛이 된 비밀들조차 알 길이 없다. 더 이상 불켜지지 않는 낡은 간판에 바람이 머리를 찧고 그 반동을 버팅기던 푸른색 아크릴 글씨 하나 저문 밤 안으로 떨어진다. 


한때, 저곳의 웅숭깊은 방 안에 나도 검은 심지처럼 틀어박혀 밤새 타들어가던 적 있었나니.





# 김명기 시인은 1969년 경북 울진 출생으로 2005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다.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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