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안부 - 이응준

마루안 2015. 2. 28. 07:33



안부 - 이응준



잠들기 전에
나는
어서 너를 떠올려야지.


새벽이 목마르고 영원이 썩었는데
다시 눈 뜰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있는
인간의 가장 비천한 순간에
나는
너를 한 번 더 그리워해야지.


예수는 아무것도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사랑은 씻을 수 없는 죄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왕도 왕국도 사라진 유적의 돌계단 위에
금방 처형당할 것처럼 목을
숙이고 앉아


죽이고 싶은 이름들을
수첩 귀퉁이에 적어 내려가던
그 어느 날의 사악함으로
이를 악물어야지.


잊지 않겠다고. 내가 너를 참 좋아했다는 것.



*시집,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세계사








白夜 - 이응준



오래 미워하던 스승과 처음이자 마지막일 화해를 하고, 나 혼자만의 화해를 하고 돌아가는 밤이다.

그가 나를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나는 비로소 고백한다. 내가
싫어했던 것은
고요하고 흠결 없는 그가 아니라


얼마나 더 어두워야 하는지
얼마나 더 밑으로 가라앉아야 하는지 알 수 없던
내 소음으로 가득 찬 이십대였다는 걸.


나여. 이제
피도 흘리지 못하는 불행한 전쟁은
치르지 말자.
당장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은
나중의 그 영혼으로 사랑하자.


밤은 검어야 할 텐데
그래야 될 텐데
오늘은 이상하다.


너무 환해
눈이 멀고 말 것 같다






# 이응준 시인은 1979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문학과비평>에 시를, 1994년 <상상>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애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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