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발소 그림 - 최치언

마루안 2015. 2. 26. 20:48

 

 

이발소 그림 - 최치언

 

 

항구는 제 발바닥을 개처럼 핥고 있다 그곳에서
사내는 청춘의 한때를 비워냈다


높다란 마스트에 올라 바다가 밀려오고 나가는 날들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주파수로 고정했다


깊고 질퍽한 검은 장화의 날들이었다 아낙네의 치마는 바람에
돛을 키웠다


한가한 골목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고무다라 속에
들어앉아 헤엄을 쳤다


용궁다방 찻잔들이 배달되고 사내는 더운 잔을 후룩 들이켰다
제 손금의 마지막 잔금을 탈탈 털어 마셨다
귓전에서 거대한 파도가 부서졌다


비탈진 둔덕에
염소를 키우고 밤새 비린 생선의 배를 따며
둔치의 허연 가시 속에서 파랑주의보를 지도처럼 펼쳐들고
그날 죽었던 친구와 영원히 이곳을 떠난 여자에게
양양전도한 뱃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아무도 전도하지 못한
부두의 교회당 목사는 방파제 끝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허옇게
뒤집어진 눈깔로 바다는 맑은 하늘 아래서 제 몸의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오늘도 사내는 마스트에 오른다 용서받지 못할
꿈을 꾸는 머리는 항상 다리를 따라가기 마련이다고
배의 선수가 선미 쪽으로 뱅뱅 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주검처럼 평화로웠다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문예중앙

 

 

 

 

 

 

독신남 - 최치언

 

 

TV 속의 여자가 옷을 벗다 말고 화면 밖의 나에게
TV를 꺼줄 것을 요구한다
밥통에 밥이 다 되었으므로 그동안 TV를 끄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밥을 먹고 나서 한참 동안 나는 그녀가 다시
무슨 말인가 해줄 것을 기다렸다
화면은 먹지처럼 어두웠고 소식은 없었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TV를 켰다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웬 노인이 화면 귀퉁이에서부터 걸어와
나에게 길을 물었다
화면 밖에서 나는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노인도 화면 속에서 이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길고 지루한 선전이 계속되었다
나는 식탁 위의 그릇들을 치우며 다시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그릇을 찬장에 넣을 쯤
사라진 노인과 여자가 부엌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떤 사내를 TV 속에서 보았는데 그가 일주일째 사라져버렸어요"
나는 여자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전혀 못 들은 듯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다음 주 이 시간에, 굵은 자막이 화면을 지퍼처럼 닫으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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