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명 연습 - 권오표

마루안 2015. 3. 2. 21:40



생명 연습(生命演習) - 권오표
-여수일지(麗水日誌) 2



변씨 영감이 죽었다


그의 시체는 등대 밑 벼랑 아래에서
이레 만에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것은 서른두 해 동안
함께 체온을 나눴던 등대였다
그날 밤 이웃들은 선술집에서
아무도 몰래 혼자 간 그의 비겁함을 욕했고
끝 간 데 없는 그의 술주정을 욕했고
얼마 되지 않는 외상값을 욕했고
그보다 먼저 바다로 가 오지 않는
그의 아들을 욕했고
일찌감치 선주놈과 눈이 맞아
줄행랑친 그의 마누라를 안주 삼아
억병으로 술에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너나 없이 선창에 나가
밤바다를 향해 오줌을 깔기다가
썰물지는 바닷물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변씨 영감의 죽음은 또 그렇게 잊혀져갔다



*시집, 여수일지, 문학동네








길 - 권오표



오직 그리움으로만 바라볼 일,


어떤 이들은 오랜 방랑에 지친 관절을 끌며
아득한 이역의 모퉁이 그 처마 끝에서
하룻밤의 안식을 꿈꾸고 있으리라
오늘도 그대는 이 한낮의 쨍쨍한 햇살 속을
포로롱거리는 종달새 날갯짓만
무심히 보고 있는가
빈 자리마다 제 키만큼 눈부시게 흔들리는
풀꽃들의 수런거림
안분(安分)의 그늘에 기대앉아 그대
삼복의 황토길 포플러 가지에 걸린 탁발승의
그림자, 그 소매 끝에 절은 소금기를 아는가
오늘밤 더욱 웅숭깊어진 저무는 강 건너
실타래 되어 흩어지는 유년의 불빛


묻고 싶다,
얼마나 더 깊어져야만
그대에게 닿을 수 있는지





# 나는 이 시를 권오표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의 유일한 시집인 여수일지에는 주옥 같은 시들이 여럿이지만 <길>을 읽었을 때가 가장 가슴이 떨렸다. 특히 <삼복의 황토길 포플러 가지에 걸린 탁발승의 그림자, 그 소매 끝에 절은 소금기를 아는가> 대목에서 울컥 했다. 시를 읽으면서 떨림과 함께 울컥하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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