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 이승희
늙은 토마토는 자라는 것을 멈추고
좀처럼 늙지 않았다
나 이제 늙어서 더 늙을 게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사각의 흰 스치로폼이 거품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입니다
어두워지길 기다려 뱀처럼 고개를 쳐든 버섯들
그네 타는 아이의 흰 발목처럼
귀두를 쑤욱 내밀며
토마토의 발밑에 제 뿌리를 박아 넣고
집 한 채 짓습니다
고요조차 몸 둘 바를 몰라 비린내를 풍기는
비밀스런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화분은 고요했습니다
아침이면 버섯은 실처럼 가늘어져
흔들리는 이빨을 매달고 사라졌습니다
내 생은 자꾸만 제목이 바뀌는 책
제목 없이 시작되는 영화 같습니다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책방 - 이승희
헌책방 불빛은 참 착하다. 저녁 내내 그 불빛 아래에서 헌책처럼 말이 없던 사내와 그 사내를 닮아 더욱더 말이 없는 의자가 말없음으로 서로 껴안고 우는 시간에도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려주지 않던가. 그렇게 등 두드리는 불빛의 손을 보았다. 제목이 지워진 책등의 글자들처럼 흐릿했다. 그 흐릿함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주는지를 안다. 내게 한때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늦은 저녁 술집에서 그대가 날 두고 떠난 자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거기서 날 바라보는 불빛 하나를 보았다. 그대 등 뒤에서 그대 가슴에 그늘을 만들던 그 불빛이었다. 내가 오래도록 그대를 지우지 못하는 흔적이 그 때문이다.
낡은 책 한 권을 꺼내든다. 불빛이 금세 내게로 흘러든다. 둥글어진 모서리로 물방울처럼 고인 불빛들. 책을 펼치면 어느새 그 안에 가득한 불빛. 내 가슴 한켠에 저 불빛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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