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생하려는 경향 - 오은

마루안 2015. 2. 23. 21:01



발생하려는 경향 - 오은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불이 켜질 때까지


몸은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너와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발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마찰력과 만유인력이 팽팽하게 맞설 때까지


혹시 켜져 있을지도 모르는 가스 불과
근사한 연애,
마주 선 사람들의 벗은 몸 따위를 상상하며


심장의 BPM이 정점을 찍고
청색 신호총이 발사되어
약빠른 자가 가장 먼저 첫발을 뗄 때까지


제 몸을 찔러 줄 젓가락을 기다리는
설익은 감자처럼


제 몸을 채워 줄 펜을 기다리는
원고지의 빈칸처럼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우리는
불길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민음사








호텔 타셀(Hotel Tassel)의 돼지들 - 오은



사람들의 음모는 언제나 아르누보식이었지요
이 말은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젊은 돼지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겁이 많고 눈이 커다란 데다 제법 순종적이었거든요
꾸불거리며 대가리 쳐들 기회만 슬슬 엿보는 거지요
저렇게 끼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면 몰라요?
젊은 돼지들은 침대 위를 뒹구는 마피아와 갱을 상상했습니다
소름이 돋았지요, 요즘엔 유기농 비료를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늙은 돼지들은 구석에 누워 심하게 낄낄거립니다
약고 퍅하고 야한 농담을 즐기죠
젊은 돼지들의 토실토실 오른 살을 부러워 했고
항상 네 다리를 벌리고 잠잤습니다
인간의 아이가 태어날 때면 엉덩이로 꼬리를 뭉갠 채 잠들었지요
너무 늙은 나머지 꿀꿀거리지 못하는 돼지들도 있어요
그들은 다만 낄낄거릴 따름이지요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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