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에게 길을 물어 - 정일근

마루안 2015. 2. 22. 21:35



별에게 길을 물어 - 정일근



별에 가서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별에 가서 따뜻한 손 잡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삶의 염전에 눈물마저 증발하는 더운 여름날은 가고
소금만 남아 빛나는 가을이 흰 손수건으로 펼쳐져
아직 푸른 하늘 아래 저 산 너머 눈뜨지 않은
착하고 어린 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해 봅니다
마침내 그리운 무덤에도 봄이 와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모두 튀어나와 흩어지는 별
오늘밤에도 그 사람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며
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해 하며 피를 흘려야 합니까
피 흘리는 손톱 밑에 붉은 첫별이 뜰 때부터
추운 겨울나무 빈손 위로 마지막 별이 질 때까지
그 사람에게로 가는 길 별에게 물어봅니다.
그 무덤으로 가는 길 별에게 물어봅니다.



*시집,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푸른숲








비로소 한 시인을 추억한다 - 정일근



1
사투리를 쓰지 않네요, 첫 통화에서 기형도는 표준어로 말했다. 중앙일보 기자였던 중앙의 그와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선생이었던
변방의 나는 굳이 한국적인 인연으로 묶는다면 신춘문예 동기, 1985년이었다. 그해 '안개'속을 헤쳐나온 그와 '유배지.....'에서 힘들게 돌아온 나는 새로운 출발선 위에 나란히 섰다.(우리는 창경궁의 원숭이였는지 몰라. 줄 선 너희들 누가누가 잘 뛰나 살펴볼까, 평론가 문학기자 그리고 편집기자들!) 도토리 키를 재듯 서로의 신작시를 곁눈질하며 알 수 없는 증오심과 함께 우리는 80년대 시의 시대 속에 버려졌다. 전연옥의 주선으로 그해 당선자들 몇 중앙일보 근처에서 만났지만 나는 길이 멀어 상경하지 못하고 그와 첫 전화통화 있었다. 1985년이었다.


2
내 취재수첩 속에는 1987년 3월 7일 기형도의 죽음이 아직도 쓸쓸히 웅크리고 있다. 그날 아침 연합통신을 타고 그의 부음기사가 타전돼왔다. 기형도란 한글이름에 익숙했던 나의 눈은 奇亨度란 한자 이름이 생경해 잠시 어색했을 뿐이다. 고백컨대 그 순간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순간 나의 고민은 어떤 문장으로 그의 그로테스크한 죽음을 내 독자들에게 알릴 것인가 뿐, 마감시간에 쫓겨 단지 신문기사적 고민으로 기형도의 부음기사를 세로로 써내려갔다. 젊은 시인 기형도 씨(29)가 젊은 나이로 자신의 생과 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문학을 마감했다. 기씨는 7일 새벽 3시 30분 뇌출혈로..... 아아, 기씨라니..... 나는 왜 동료시인 기형도의 죽음에 애도하지 않았던가 부조리한 운명을 향해 돌을 던지지 못하는가. 나는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시인이여, 나는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할 것 같았다. 요란한 시의 시대도 끝나가고 있었다.


3
1993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나는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다.
이제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의 시간도 흘러가고
앞다투어 추모하던 현란한 슬픔의 시간도 흘러가고
아직 가보지 못한
안성, 기형도의 묘지 위에도
푸른 봄풀 되살아나겠다
이 새벽
오래 덮어둔 그의 시집 첫장을 펼치며
비로고 추억하는 기형도
잘 가라 시인이여
잘 가라 도반이여
그대 시는 죽어서도 이리 빛나고
나는 살아 있는 죄로 또다시 시를 쓴다





# 아주 오래전에 출판사 푸픈숲에서 좋은 시집을 많이 출간했다. 여전히 출판사는 건재하지만 시집은 잘 내지 않는다. 아니면 시집 출판을 아예 접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오래된 시집에서 시인 기형도를 끄집어 낸다. 여러 시인이 기형도를 기리는 시를 발표했다. 이홍섭 시인도 <낯익은 자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기형도 죽음을 기억했다. 시인은 죽어 빛난다는 말에 공감한다. 좋은 시 읽는 날들이 행복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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