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쁜 평판 - 최영미

마루안 2015. 2. 22. 00:47



나쁜 평판 - 최영미



예술가에게도 도청 공무원의 품성을 요구하고
시인도 지방 면서기의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한국사회에서


내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불안한 자아.
기우뚱거리는 배에 투자하려는 선주(船主)는 없다고
누군가 내게 충고 했다


가위로 도려낸 번호들이 늘어나고
실망의 밑줄이 그어진 수첩.
자유의 달력 밑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정든 항구를 버리고
운명의 키를 쥐고 선장이 되어 항해하련다


어차피 사람들의 평판이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금 같은 것.
날씨가 화창하면 아무도 온도계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문학동네








여기에서 저기로 - 최영미



올해도 님을 만나지 못한 분홍빛 벽지를 팔고
한번 펼치지도 못한 화사한 이불을 빨고
이삿짐을 싸고 베갯잇을 바꾸었지


아침에 빠져나온 잠자리를
밤에 들어갔을 뿐인데,
여행의 끝이 보이네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
여기에서 저기로,
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
나도 모르게 빠져나간 젊음.
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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