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흔, 저 망할 - 성선경

마루안 2015. 2. 22. 11:03



마흔, 저 망할 - 성선경



햇살이 쨍쨍 꺼어진 유리처럼 빛나는 하오

한참을 잊고 지내왔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치자

기다렸다는 듯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 치자

슬데없는 안부들을 술잔처럼 오갔다 치자

괜히 실실거리는 웃음들이 일회용 종이컵처럼

마구 낭비되고 있었다 치자

괜한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치자

서로 눈 가리고 아웅거린다 싶었다 치자

아들의 우등상부터 아내의 몸무게까지

온갖 자랑거리가 소비되고 있었다 치자

돼지 삼겹살을 더 시켰다 치자

사심 없이 공기밥을 앞에 뒀다 치자

실실거리는 웃음들이 아직도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었다 치자

아직도 무궁 무궁 자랑거리가 있다고 치자

그래도 요즘 정치가, 하고 화제를 잠시 바꾸었다 치자

만족한 듯 꾸르륵 게트림을 했다 치자

아주 유쾌한 만남이었다고 악수를 나누었다 치자

흘러간 옛노래를 흥얼거렸다 치자

여기 저기 흩어지는 좁쌀들

더욱 둥글게 포만한

저기 좁쌀 한 포대.



*시집, 몽유도원을 사다, 천년의시작








통풍 - 성선경



무 속같이
뼈 속에도 바람이 들다니
제 속으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것일까


뼈도 마음 같은 것도
이제 제 속에 오래 담아두는 것은 어렵다고
투덜거리며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고
비워둔 골방처럼 자주 창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툭 툭 신호를 보내는 건지


이제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눈길에 힘을 주는 아내와 같이
독립을 하자고 이미 마음을 고쳐먹은 듯
히죽거리는 다리


그래, 이제 다 놓아주자
어디 내 뜻대로만 살 수 있냐고
마음을 열어도
그래도 뭔가 아쉽고 미심쩍은
망할, 저 마흔의 언저리에서부터
절뚝거리며 나는
통풍(痛風)을 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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