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의 고요 - 황지우

마루안 2015. 2. 21. 21:33



세상의 고요 -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성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서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정








等雨量線 1 - 황지우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물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절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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