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숨어있기 좋은 방 - 김사이

마루안 2015. 2. 20. 10:33



숨어있기 좋은 방 - 김사이



누가 들고 나는지 모르는 벌집들
한쪽 방에서 가늘고 거친 숨소리가 뒤엉켜 절정에 다다르고
다른 쪽 방에서는 악다구니와 와장창 소리가 장단을 맞춘다
그리고 밤새 열고 닫히는 문소리들
그 사이에 내가 숨는다
햇빛 거부한 창은 틈을 만들지 않고
빗물 배인 거무튀튀한 천장
형광등에 대롱대롱 집 지은 거미가 있는
좁은 부엌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 까고 오줌을 갈겨도
아무도 욕하지 않는 이곳
가끔 삶이 쉬러 가자 한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무심한
아침이면 멀쩡하게 출근을 하고 슈퍼에 가고 산에도 가고
맑은 햇살에 눈 못 뜨는 나 같은 게 아니라
시원한 바람이 가슴 속을 헤집어도
그저 비슷한 것 같은
땅 위 삶이 뭐 대단치도 않으나
자꾸만 웅크려지고 안으로 말리는 내 몸뚱이
태어나면 모두 잊어버리지만
엄마로부터 세상 소리들을 모두 듣는다는 자궁 속 태아
이곳에서 다 드러내놓고 뒹굴뒹굴한다
애기처럼
자궁과 세상이 하나될 때까지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가리봉1동에 살아요 - 김사이



벼르고 벼르다 가는 목욕
내게 있어 몇 안 되는 큰일 중 하나
스르로를 턱밑까지 다그쳐
꼴딱 밤 새워서 목욕탕을 가는
굼뜬 행동 때문일까 생각해보지만,
일어서지 못하고 잔뜩 웅크린 채
가만가만 물을 끼얹어야 하는 부엌
여름엔 그렇게라도 하지만
따뜻한 물 나오다 말다 하는데
텔레비전 소리 바람 소리 그짓 하는 소리까지
사방팔방 문 하나 사이에 두고
한겨울 한밤중엔,
슬쩍 도망가버릴 수도 없으니
내 몸뚱이 씻어내는 것조차
내 맘대로 못하는





# 김사이 시인은 1971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호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공부를 했고 2002년 계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첫 시집이다. 남자 이름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시인의 본명은 김미순, 초등학교 다닐 때 한 반에 꼭 하나씩은 있었던 흔하면서 어딘가 친근한 이름이다.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쁜 평판 - 최영미  (0) 2015.02.22
세상의 고요 - 황지우  (0) 2015.02.21
그 아득한 그리움의 거리 - 한기팔  (0) 2015.02.19
몸이여 - 백무산  (0) 2015.02.19
사는 일 - 허연  (0) 2015.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