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몸이여 - 백무산

마루안 2015. 2. 19. 10:37



몸이여 - 백무산



한 번 찾아와서는 오래 물러나지 않던 열병
의자 짚고 일어서려다 핑 어지럼이 도는 사이
코 앞에서 난데없이 훅 끼쳐오는 한소끔 냄새의 기억
그래 그걸 먹고 나면 일어날 것만 같은데
지난 시절 공장에서 먹던 스팀으로 쪄낸 설익은 보리밥과
돼지비계 몇점 둥둥 뜬 잡탕 꿀꿀이죽
그 뜨끈뜨끈한 것 한 그릇 훌훌 먹고 나면
그만 툴툴 털고 일어날 것만 같은데
그랬지 옛날 어른들도 몸져누우면 꼭 주렸던 시절에
먹던 시래기죽이나 개떡 같은 걸 찾으셨지
하필 몸은 허기진 시절만 그리워하는 걸까
몸이 떠올리는 건 왜 모두 쓸쓸한 것들일까
거리를 지나다 철공소에서 들리는 그라인더 소리나
시너 냄새에서나 추억을 떠올리는
몸이여
참 미안하다
나를 먹이려고 땀과 아픔을 바치고
굴욕과 죄도 달게 삼켰지 목구멍뿐 아니라
사랑도 변변찮아 네 뜨거운 출구도 늘 쓸쓸하게 두었지
그래도 넌 비열한 곳에 가서 줄 서려고 안달하진 않았지
그래서 비겁했고 오래 괴로웠던 내
몸이여
이제야  처음으로 지친
널 안아본다.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슬픈 인사 - 백무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사
잘 살아요―


여기서 따로 가면서
당신은 내일을 살 수 없고
내일은 나 혼자 가면서
아무도 뒤에서 지켜보는 이 없는 거리를 혼자 가야 하는
가서는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는
뒤가 텅 비어버리는 그 인사
잘 살아요―


잘 살았어요? 그간의 얘기 나눌 기약도 없고
어디선가 같은 시간에 있을 거라는 환상도 가질 수 없는
뒤가 휑하니 뚫려버리는 그 인사
삶은 이미 벼랑 끝에 있었다는 말
그대라는 실낱에 전부가 매달려 있었구나
잘 살아요―


아, 인간에게도 뿌리가 있었구나
등뒤에 깊은 심연이 있었구나
잘 살아요―
푸른 나무가 공중에 던져지는
아, 자유라는 이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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