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 - 허연
술 취해 집을 뛰쳐나간 아버지와
전화통 붙잡고 싸운 날
회사에선 시말서를 쓴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사는 거다.
때맞춰 창밖 남산에 눈이 내리거나
옛 여인이 오랜만에 예수 믿으라는 전화를 걸어온다면
판단 안 서는 그 상황은 차라리 아름답다.
가장 축약된 문장으로 비겁한 시말서를 쓰고
삼거리 부대찌개를 먹고
담배를 반쯤 피우다 말고
다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누워 있는 불상들이 일어나는 것만큼
삶이 호쾌해지는 건 힘든 일이다.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 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아득한 그리움의 거리 - 한기팔 (0) | 2015.02.19 |
---|---|
몸이여 - 백무산 (0) | 2015.02.19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0) | 2015.02.17 |
눈물의 횟수 - 김경미 (0) | 2015.02.16 |
사람아, 이쯤서 - 김윤배 (0) | 2015.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