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마루안 2015. 2. 17. 21:40



물 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 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김남조 시집, 情念의 旗, 삼중당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에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 특별하기로는
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 중 특별하기로는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 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아주 오래 전에 삼중당 문고가 있었다. 지금이야 가난해서 책을 못 읽는 사람은 많지 않겠으나 당시의 나는 책 사볼 돈이 없어서 보고 싶은 책을 못 보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엔 돈 없어서 책을 못 읽는다기보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더 맞을 것이다. 그때 나에게 독서의 목마름을 가시게 해준 고마운 책이 있었으니 바로 삼중당 문고다. 한손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에 각종 소설은 물론 톨스토이 같은 세계문학도 만날 수 있었고 김남조 시인의 이 시집도 삼중당 문고로 만났다. 리듬이 좋아 읽기가 참 수월했던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를 외우기도 했는데 기억력 나쁜 내가 외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였다. 아직까지 시 주변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는 것도 그때 읽었던 이런 시집 영향이 클 것이다. 십대 때 읽었던 시를 나이 먹어 다시 읽는 시맛이 새롭다. 시 읽을 때만은 여전히 사춘기 문학청년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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