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람아, 이쯤서 - 김윤배

마루안 2015. 2. 16. 05:37

 

 

사람아, 이쯤서 - 김윤배


눈이 내렸던가 아득하다 아득히
눈이라도 내렸던가 십년도 더 오래전에 내리던 눈이던가
흰 뼈마디를 풀자면 눈이라도 내려 쌓여야 하는 것인가
앙다문 뼈마디에 꽃잎이라니 오지 않은 꽃잎으로
입춘도 며칠 지나 실없이 웃음 헤퍼지는 뼈마디,
오지 않은 꽃잎 맞이하자면 십년도
더 오래전에 내리던 눈이라도 내려야 하는 것인가
뼈로 뼈를 채우던 긴긴 계절
눈이라도 오라 울었던가
그리하여 이제 경칩 가까이
바람조차 푸수수 가슴 헤쳐놓는 날
그 뼈마디들 완강한 침묵을
내려놓는다 하면 눈이라도
십년도 오래전에 내리던 눈이라도
저 낡은 뼈마디마다 내려 쌓여야 하는 것인가
사람아! 이쯤서 내 뼈마디 풀어야 하는 것인가


*시집, 바람의 등을 보았다, 창비

 

 




내 몸의 중간숙주 - 김윤배


나는 날아가는 앵무새의 등에 말을 얹는다 말은 늘 미끄러져내린다
나는 나무의 나이테를 세며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 욕망은 좌절이다
반투명 유리창 안에 거짓말을 꽃으로 피워올리는 나는 연탄재를 꽃으로 보지 않는다
속임수를 경멸하는 나는 돌 속에 무덤을 짓는다 돌무덤은 작은 바람에도 열린다
지루한 일상을 못 견디는 나는 삼중면도날로 나의 정맥을 깎는다 돌무늬가 돋아난다
나는 붉은 장미꽃 위에 영원한 이슬로 산다 살의를 찬미하는 시간은 검다

내 안에 서식하는 나는 홀로이며 여럿이다

인간이어서 아름다운 악마, 축구공에 다리가 없어 싫다고 하는 악마, 전쟁터에서 다친 군인의 초상화를 보며 눈과 왼쪽 심장을 다쳤다고 가슴을 치는 악마가 내 안에 서식한다

내 몸은 모든 나의 중간숙주여서 슬프다

 




*시인의 말

몇달에 한번씩 북한강을 보러 갔었다. 강물 위에서 햇빛이 낡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강이 저물기 시작하면 강물소리를 가슴에 채워 돌아오곤 했다.
내 사랑은 오래되었고 내 사랑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것이 강물이었다. 한순간 꽃비가 강을 채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