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카트만두 가을 저녁 일곱시의 시 - 곽재구

마루안 2015. 2. 5. 10:15

 


카트만두 가을 저녁 일곱시의 시 - 곽재구



삼겹살 파티가 끝난 뒤
그들은 설산을 넘어 레로 가고


홀로 남은 그는
캘커타로 갔다


로컬버스를 타고
야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방향은 각기 달랐지만
밤하늘의 별은 고요히 빛났다


우리가 하루에도 서른번씩 마흔번씩
서로 헤어지는 이유는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상의 시계판 위에 가을 저녁 일곱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을 미워했고
우리는 우리를 미워했다


나무들의 몸을 떠난 낡은 잎들이
오랫동안 국경 마을을 떠돌고
흰 눈이 내리고
그해 태어난 강아지들이
눈 덮인 초등학교 운동장에 분주히 발자국을 찍는 동안


봄이 오고
새로 핀 꽃가지들과 함께
당신은 또 카트만두로 갈 것이다


하루에도 서른번씩 마흔번씩
서로 사랑하고 아파하며


물속의 빵을 나누다가
더욱 견고해지거나 부스러질 것이다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 창비








이국(異國)의 호숫가에서 늙은 노동자와 탁구 치기 - 곽재구



당신의 광대뼈와 목울대를 껴안아주고 싶었지
묵은 등피를 찢고 쏟아져나온 새봄의 꽃향기 같아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는 한평생 붉은 연기가 솟구치지
당신과 나 어떤 운명의 궤적으로 서로 만난지 모르지만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토닥토닥 받아넘기며
나는 당신의 전생을 생각하고
당신은 내가 떠돌아다닌 국경 마을의 허름한 마굿간과 염소들을 생각하지
하루 300루피의 방값을 나누어 내기로 하고
어젯밤 우리가 낡은 나무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을 때
나는 호수의 배들이 흰 꽃을 수북수북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었지
이른 아침 호숫가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꽃을 실은 배를 보았나요?라고 물었고
당신은 내게 물 냄새 가득한 흰 꽃 한 송이를 건넸지
우리는 함께 노란 콩을 삶은 아침을 먹고
구름과 석유와 바그다드에서 죽은 당신의 동생 이야기를 했지


순한 풍차 같아
왼손잡이인 당신


강하게 날아오르는 시간의 하얀 궤적을
당신은 부드러운 바람으로 받아넘기지
한평생 선한 땀과 피 속에 뼈를 담근 이만이 빚어낼 수 있는
고요한 바람 앞에서
나는 시간이 사라져가는 소실점을 보았네
한평생 사랑한 글리세린 내음과
한평생 사랑할 허름한 노래가
끊임없이 테이블 위를 오가는 동안
깊게 융기한 당신의 광대뼈와 목울대 사이 어디엔가
내가 떠나야 할 또 하나의 노래의 국경이 있음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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