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독 - 이덕규

마루안 2015. 1. 28. 10:51



빛의 원액, 그 치명적인 독 - 이덕규



순천 교도소 쪽문이 열리고 그가 밝은 빛을 향해 걸어나왔을 때, 순간
완강한 햇살오라기들이 다시 그의 발목을 묶었다
한때 빛을 탕진해버린 희망의 범법자로서
굶주린 시궁쥐처럼 어슬렁거리다가 마지막으로 걸려든 것 또한 느닷없는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던가


얼떨결에 기어들어간 캄캄한 굴 속에서
그는 또 얼마나 많은 빛의 씨앗들을 까먹었는지 별조차 뜨지 않는 그 희망사육장에서
그새 이빨이 두 개나 빠져 있었다


비로소 딱닥한 모서리에 대한 유혹은 사라졌고 인내의 물렁한 식사는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이제, 도저히 뚫을 수 없었던 저 견고한 담장의 미세한 균열 속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원액이
치명적인 독처럼 환하게 퍼져가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미신처럼 말랑말랑한 두부를 먹으며 웃는 그에게


굳이 말하자면, 앞니 없이도 살 수는 있다는 것이다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막차 - 이덕규



이쯤에서 남은 것이 없으면
반쯤은 성공한 거다
밤을 새워 어둠 속을  달려온 열차가
막다른 벼랑 끝에 내몰린 짐승처럼
길게 한 번 울부짖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종착역


긴 나무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넣고
시린 가슴팍에
잔숨결이나 불어넣고 있는
한 사내의 나머지 실패한 쪽으로
등 돌려 누운 선잠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 툭 떨어지고
그 위로 오늘 날짜
별 내용 없는 조간신문이
조용히 덮이는


다음 역을 묻지 않는
여기서는 그걸 첫차라 부른다





# 시 한 편만 읽어도 참 시를 잘 쓰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제목 또한 오랫동안 기억될 정도로 단박에 새겨지는 시가 많다. 오래 단련된 시 쓰기의 내공이 느껴지는 시에서 감히 절창이란 이런 거라고 인정한다. 반복해서 읽어도 여운은 여전하다. 시보다 더 시적인 자서 또한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시인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보다.


*자서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